아무 일 없는 듯 - 최태식 시집
상상인 시선 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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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최태식 시인의 시집 『아무 일 없는 듯』은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아무 일 없었다’고 적힌 자리엔 균열과 상흔, 막 떠오르거나 꺼진 온도들이 어른거린다. 이 세계는 표면을 매끈히 봉합하는 말을 믿지 않고, 생활의 잔기술·생존의 반사신경·문명사의 비명이 스민 사물과 풍경을 앞세운다. 수건·깡통·침목·레일·폐사지·고속철·DMZ·오두산 등, 이 모두는 시대의 여러 요소를 말해주는 기호들이다. 시인은 이를 일상으로 끌어내 문명의 광장과 사적인 밀실을 왕복하며, 효율과 편의의 그늘에서 생겨난 결핍과 폭력의 문법을 여실히 까발려 내보인다.
이를테면 「수건 접기」에서 사랑은 형식미가 아니라 소모의 물성으로 증명되고, 베란다의 시듦과 호스피스의 손바닥 앞에서 ‘펴고 접는’ 몸짓은 생과 사의 최후 언어가 된다. 「1,435밀리」는 가까워지려 만든 철도의 표준궤도가 오히려 우리를 ‘나란히 달릴 뿐 만날 수 없는’ 레일로 고정하고 마는 것을 보여준다. 「스마트 기차」와 「깡통의 감정」은 속도·편의가 감정을 삭제하고, 내면의 공동이 네트워크의 소음으로 변환되는 오늘의 미디어 생태를 풍자한다. 문명 비판의 칼날은 「판의 명제」에서 노골적이다. 흰 닭과 검은 닭의 격투, ‘새로운 별자리’라는 선동, ‘광장을 찢는 외침’은 결국 우리의 미래를 울타리 밖으로 내쫓고 있는 모순으로 귀결된다.
분단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도 독창적이다. 「함수지대–DMZ」는 군사어를 생태 감각으로 전치하고, ‘새를 나눌 수 없으니 땅을 나누었다’는 문장으로 부조리를 투명하게 환기한다. 「오두산」에서는 김포, 관산 노을빛이 ‘아무 일 없는 듯’ 기록되는 오늘의 현실이 사실 상흔의 연속임을 환하게 보여주고 있다. 「펀치볼」과 「몰려드는 어둠을 태우면–황토현에서」는 전쟁과 민란의 역사를 현재의 공기 속에 소환해, 해방의 환희가 또 다른 폭력의 발화점이 되는 역설을 얘기한다.
환경을 보는 이 시집의 시선은 풍자와 공포로 교차된다. 「눈먼 새」의 변종 이미지는 폐기된 존재가 포식자로 귀환하는 역침투의 공포를, 「반가운 소식」은 쓰레기를 ‘해결’하는 괴물을 상상하는 문명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언어에 대한 경계도 날이 서 있다. 「벽에 놓은 말」에서 ‘입속에 자라는 말’은 전파의 날개를 달고 타자를 짓밟고,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는 재개발·담보·유치권의 문법으로 몸과 관계가 기표화되는 현실을 폭로한다.
그럼에도 이 시집의 결론은 절망이 아니다. 「스며든다는 것」은 점령이 아닌 체류, 지배가 아닌 공명, 획득이 아닌 나눔의 윤리를 복원한다. 간병의 손, 침목 사이 거리, 김포의 노을, 「폐사지에서」의 바람과 돌탑, 이 낮은 온도의 장면들에서 미래의 감각이 발아한다. 이 시집은 거대한 선언 대신 작은 사물과 구체적 지명으로 자본의 과속, 문명의 역설, 환경의 자기기만, 분단 서사의 관성을 동시에 건드리는 의미 있는 노력의 소산이다.
이 시집 『아무 일 없는 듯』은, 언어의 호흡을 낮추고 사물의 본모습을 복원하는 노력의 성과이다. 여기서 서정은 문명의 반성으로, 풍경은 정치의 감각으로, 개인의 기억은 공동의 기록으로 전환된다. 아무 일 없는 듯 오늘을 적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배워야 할 문명의 기술이라는 것을, 이 시집은 오래,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증명한다. 우리는 광장에 환호하고 속도에 취하지만, 시는 마지막에 속삭인다, 스며들라고. ‘살며시/당신에게.’
추천사
최태식 시인은 좀 늦은 나이에 이미 무성한 시단에 낯선 얼굴로 등단하고 첫 시집을 내게 되었다. 늦깎이라고 흔히 말한다. 20대부터 시단에 이름을 올리고 뛰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동안 다른 길을 걸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문학이 인생 경험으로 얻어진 성숙한 열매라야 한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모든 것은 열매가 익는 과정이기에 시인으로서 늦깎이란 수식어는 원칙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최 시인은 「벽에 놓은 말」 「해」 「콜럼버스의 불안」 등으로 내 이름의 문학상을 받았다. 현대적인 참신한 감각이 언어예술로서 시선을 끌었다. 또한 그동안의 수상자들과 달리 과감한 기법적 실험정신과 비판 정신에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런 의미의 예술성이 교양과 취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와 역사에 기여하는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사랑과 평화를 위한 예술이다. 최 시인은 「벽에 놓은 말」에서 “입속에서 말이 자란다”라고 했다. “전파의 날개를 달고” 달리는 말은 언어예술의 시어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말굽에 짓밟힌다”는 말은 시인이 올라 타고 달리는 말의 은유다. 짓밟히면 상처를 입지만 상처 없이 역사는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좀 여유 있게 출발했지만 앞서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김우종(문학평론가, 전 교수, 창작산맥 발행인, 은관문화훈장)
최태식 시인의 이 시집은 큰 목청 대신 낮은 숨으로 다가온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이지만, 그 얕은 물결 아래에는 생활과 역사, 제도와 문명이 부딪혀 만든 잔모래가 촘촘히 깔려 있다. 시인은 커다란 구호를 불러 세우지 않는다. 대신 손닿는 물건들과 길가의 표식들, 선로의 간격과 바람이 모퉁이에서 꺾이는 순간을 끈기 있게 바라본다. 분단된 땅, 속도를 숭배하는 현대문명, 효율성 아래 숨겨진 결핍과 폭력이라는 사회적 모순 등, 최태식 시인은 이를 낮은 목소리로 증언한다. 또한, 그의 시는 민란과 전쟁 등 역사의 상흔을 현재의 공간에 불러내 그것이 우리 정신에 깊게 새긴 트라우마를 들춰 보인다. 그의 문장에는 풍자와 분노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의 시어들은 쉽게 상처를 주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 대신 따뜻한 소통의 언어로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서정은 자기 위안을 넘어 하나의 성찰이 되고, 풍경은 배경을 벗어나 관계의 장이 된다. 그래서 이 시집은 선언문이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비망록에 가깝다.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빠르게 달려온 시대의 폐부에 손을 얹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죽은 우물을 긷고
누추한 신발을 물었다
거꾸로 걸었는데
멈춰야 하는지 나아가야 하는지
나 하나 붙잡는 데도 시간이 달아난다
하릴없이 꼬이는 나를 끌고 다닌다
미처 어울리지 못한 것들에 미안하다
시집 속으로
내 안에 맺힌 당신을 닦아내면
조용한 호수가 떠오르지
나는 당신을
백조라고 불렀어
-「수건 접기」 부분
나는 기다리는 사람
불면의 별이 뜨고 지는 사막
한여름 밤에도 지독한 한기를 느끼지
-「차茶 우림 」 부분
비에 불어 퉁퉁 떨고 있다
서로가 개밥으로 어두워질 때
종일 비가 내린다
-「서로가 개밥으로 어두워질 때」 부분
나는 마지막 남은 달력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가파르게 매달린
해진 꿈을 뜯는다
밤새 눈이 내린다
-「발자국을 지우며」 부분
당신이 떠난 자리
붉게 물든 누이가 울고
우리는 넝쿨째 말문에 걸린다
-「넝쿨 가족」 부분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고요의 땅 위로
아무 일 없는 듯,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한 척 오늘을 기록할 수 있을까
-「아무 일 없는 듯 -오두산에서」 부분
시간을 갈아타며
기다림 하나로 버텼다
처음부터 하나였을까
마치 오래전 사람처럼
-「두 몸을 끌어안은 처음 -두물머리」 부분
빗줄기 굵어진다
문을 열어 봐
산이 점점 봄을 입고 있어
-「노르망디로 가자」 부분
스며든다는 것은
먹물이 흰 종이에 번지듯
살며시
당신에게
-「스며든다는 것」 부분
차례
1부 너는 긴 여행의 활자를 풀어놓지
수건 접기/ 망각의 바다/ 마법에 걸린 항해사/ 차茶 우림/ 모자이크 양식/
주장의 안에 산다/ 1,435밀리/ 곡선의 미학/ 갠잔애/ 붉은 달이 피는 손/
여리고 그리운/ 햇볕 굽기/ 해/ 멍에의 방식
2부 미처 풍경이 되지 못한 사물
나를 뭐라 부를까/ 서로가 개밥으로 어두워질 때/ 깡통의 감정/ 퉁소/ 넝쿨 가족/
사비성沙飛城/ 명성산 억새/ 신발이 신발을 밟아도/ 부러진 손/ 판의 명제/
소음의 거처/ 발자국을 지우며/ 뼝창에 피는/ 뒤끝의 말/ 숲 이야기
3부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가위바위보/ 함수지대/ 아무 일 없는 듯/ 두 몸을 끌어안은 처음/ 펀치볼/
몰려드는 어둠을 태우면/ 사과선/ 에덴의 서쪽/ 눈먼 새/
당신의 동전은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돌지 않는 바퀴/ 그들이 온다/
반가운 소식/ 우아한 코끼리들의 식사/ 커피 벨트
4부 기울어지는 곡선으로 짚어가는 내일
장수풍뎅이/ Ctrl+C & Ctrl+V/ 벽에 놓은 말/ 콜럼버스의 실험/ 노르망디로 가자/
스마트 기차/ 그 겨울을 지나던 우리의 자세/ 눈사태/ 풍경 바꾸기/ 청춘/ 폐사지에서/
네모를 들켰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스키타이 얼음공주/ 망치고기/ 스며든다는 것
해설 _ 여기 우리가 굽어지는 시-간
정기석(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여기 우리가 굽어지는 시-간
최태식 시인은 삶 속에 접힌 시간을 펼쳐내면서, 시간 속에서 견디고 있는 ‘당신’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을 시 속에 머물게 한다. 다만 ‘당신’이 지금 부재하다면, 현실에서 기억 속 ‘당신’과 실제 만날 수는 없으니 그 만남은 다분히 마법적인 시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법에 걸린 항해사”(「마법에 걸린 항해사」)이고, 어느 기억 세계를 펼쳐내기 위한 여정 중에 있다. 하지만 이 마법적 만남에는 항해의 고단함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것은 삶을 견디면서 만들어낸 시적 시간이다. 그것은 ‘나’ 이전에 ‘당신’이 먼저 “모진 시간을/휘어지며 견딘” 덕분이다. “휘어지며 견딘” ‘당신’이 “굽은 몸으로/백년송이 되”어 준 덕분이다.(「곡선의 미학」). 그 “아픔도 눈이 부”셔서, 이를 “저편으로 떠나보낼 수 없는” 시인은 “기억을 삼키며/계절을 웅크린다”(「명성산 억새」). 그러면 다시 ‘당신’은 “긴 여행의 활자를 풀어놓”는다(「차茶 우림」).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당신’을 만난다.
‘내’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주어가 되어 ‘나’와 ‘당신’을 산다. 시간이 ‘나’를 끌고 가고 ‘나’는 접히고 펼쳐지면서, 접힘과 펼침의 삶의 굴곡 속에서, 최태식 시인의 시는 그 견딤을 제 몫으로 두기로 한다. 시는 시간의 무게를 함께 떠안기로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지금의 시-시간도 접혀질 것임을 안다. 지금 시집을 펼친 ‘당신’이 시로 두터워지는 순간이다. “함께 울어”(「명성산 억새」) 만들어내는 시간의 결정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각각의 삶이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모든 ‘당신’의 단독성singularity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우리가 서로의 보편적 ‘당신들’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다. 우리는 “개울에 비친 달처럼/병아리 망막에 맺힌 하늘처럼” “구름이 달을 스치듯/쇠백로가 물가를 걷듯” “먹물이 흰 종이에 번지듯//살며시/당신에게” 스며든다(「스며든다는 것」). 우리는 서로 스며들기 위해서, 삶 속에서 서로를 견디고, 굽었을 뿐이다. ‘당신’의 몸이 굽은 것은 삶을 견뎌온 시간을 안기 위함이다. 그러니 삶 속에 굽어진 시간이 미학을 만든다. 당신은 삶을 어떻게 견뎌왔는가. 우리는 삶을, 서로를, 더 잘 안기 위해 굽었을 뿐이다. 다시,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장면을 접고 또 펼치며 우리를 공동 창조한다. 때로 비극이고 비애일지라도, 괜찮다. 우리는 시간에 스며든다. 시간이 우리를 언제 펼쳐낼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안다.
-정기석(문학평론가)
작가 약력
최태식
· 정읍 출생
· 창작산맥 신인문학상 수상(2021)
· 한국힐링문학상 수상(2023)
· 중앙일보 시조 백일장 당선(2024)
·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2025)
· 제16회 김우종문학상 수상(2025)
· 희망봉광장 디카시 신인문학상 수상(2025)
· 시집 『아무 일 없는 듯』
· 숲 생태 지도자, 한전 지사장(전)
poleaurora@hanmail.net
최태식 시집 아무 일 없는 듯
상상인 시선 065 | 2025년 10월 16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54쪽
ISBN 979-11-7490-014-2(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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