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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윤혜숙의 시집 『그래도, 꽃 필 자리』는 상실과 쓸쓸함의 언저리에서 끝내 피어나고자 하는 생명력의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이 시집은 삶의 균열과 상처, 그로 인한 슬픔과 공허를 응시하는 한편, 그러한 부정적 경험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견디고 이겨내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치열하게 그려낸다.
시집의 첫 작품 「저 붉은 새, 포인세티아」에서 화자는 어둠 속에서조차 잎을 틔우는 포인세티아의 붉은 줄기와 마주한다. “엄마의 심장은 여러 개였다”는 구절은 슬픔과 상실을 품어내는 모성적 존재로서의 자연을 환기하며, 고통의 중심에서 생명을 키우는 힘을 노래한다. 시인은 슬픔이 단순히 소멸의 징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기원이 되는 자리임을 반복해서 환기한다. 이러한 생명력은 「흐린 꽃을 슬픔에 꽂고」와 같은 시에서도 두드러진다. 화자는 꺾이고 시든 꽃들 속에서 슬픔을 꽃바구니로 엮어내는 손의 기억을 되살리며, 쓸쓸함을 가꾸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그린다. 슬픔을 “주무르던 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상실의 시간을 견디며 새로운 의미를 짓는 손길이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조는 쓸쓸함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이 쓸쓸함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쓸쓸함을 양지바른 쪽, 다시 말해 생명이 움트는 자리로 전환한다. 「쓸쓸은 양지바른 쪽에 있다」는 작품에서 “쓸쓸은 양지바른 쪽에 있다/뿌리를 뻗고 잎이 돋고 꽃이 핀다”는 구절은 쓸쓸함이야말로 생명력을 키워내는 비옥한 공간임을 상기시킨다. 시인은 쓸쓸함의 정서를 대지와 자연의 생명력에 연결하며, 상실 이후의 세계를 새로운 성장의 공간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이 시에서 쓸쓸함은 깊을수록 따뜻한 땅속으로 스며들며, 봄의 푸르름 속에 숨어 있다. 이는 시인이 슬픔과 상실의 공간을 생명력의 터전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윤혜숙의 시적 언어는 식물적 이미지와 상상력으로 촘촘히 짜여 있다. 표제작 「그래도, 꽃 필 자리」의 민들레 홀씨는 시멘트 담장 위라는 생명에 불리한 공간에서조차 뿌리내리려 한다. 이는 절망적 조건 속에서도 존재를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민들레 홀씨와 모래바람의 알갱이, 허공의 헛것이었던 ‘나’는 다시 땅을 찾고, 햇살을 찾는다.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과 시인의 상처받은 삶은 맞물리며 새로운 생존의 서사를 엮어간다. 이러한 식물적 상상력은 시집 전반에 흐르는 특징적 미학이다.
또한, 이 시집 시들은 자연의 고통조차 함께 바라본다. 「서 있는 것들은 위험하다」에서 보듯 쓰러진 가로수는 시인에게 젊은 날 쓰러져간 사람들의 부재와 겹쳐지며, 자연의 상처와 인간의 상처가 포개어진다. 하지만 그 이파리가 “비 갠 아침에 함초롬하다”는 구절은 쓰러진 뒤에도 새 삶을 준비하는 생명력을 암시한다. 이렇듯 윤혜숙의 시는 인간의 고통과 자연의 생명력이 긴장과 화해를 이루는 지점을 탐색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억새, 목련, 대추나무, 민들레 등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상처받은 삶을 견디며 피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은유이다.
시집 『그래도, 꽃 필 자리』는 슬픔과 쓸쓸함을 노래하지만, 그 끝에는 늘 다시 꽃을 피우려는 의지가 놓여 있다. 시인은 말한다. 그래도, 꽃은 피는 법이라고. 이 시집은 상실로부터 다시 생명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의 기록이다.
시인의 말
시골길을 거닐다 새의 빈 둥지를 보았다
한때는 정성스럽게 둥지를 만들고
사랑을 하며 알을 부화시킨
삶의 의미가 온전히 깃든 곳이었으리라
시집을 내는 것은 둥지를 비우는 일이다
등에 꽃 한 짐,
우레 한 동이를 이고 와서 벗어 놓는 일이다
소소한 바람에 흔들리거나
막다른 길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가슴을 스치는 자음과 모음의 날 글자를
애써 보내는 일이다
또한,
아득한 저 너머가 궁금하다
2025년
윤혜숙
시집 속으로
암호를 풀겠다고 혼잣말을 허용하는 날
세상의 끄트머리 같은 말들이 비에 젖는다
-「끄트머리 같은 말」 부분
그러니까 나는,
고라니가 보았던 뜨거운 찰나의 빛을 보았지만
먼 길로 떠나는 목차에서 지워진 이름이 되었다
-「불빛에 지워진 숨」 부분
당신이라는 언덕을 비켜서서
맑은 날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로 신발을 신는다
나는, 등이 가려운 새처럼 운다
-「달은 습관처럼 돌아오고」 부분
퍼붓는 폭우에 방향을 잃어갈 때
어둠의 뼈에 금이 가듯 천둥은 나를 뒤섞는다
나는 지금 장마를 표절하는 중이다
-「쏟아지는 신호등」 부분
내 입속에 쟁여둔 말들이
개화를 앞둔 봄꽃만 같기를
「폭설 속으로 뛰어드는 말」 부분
빈 소주병으로 휘파람 불던 오빠도
사슴벌레처럼 방향을 잃었거나
빛을 쫓았을 텐데, 어디까지 갔을까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북두칠성을 끌고 가는 사슴벌레」 부분
무수한 별을 그러모아 태우면
당신 냄새가 난다
이 사이에 낀 울음에서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슬픔이 꼬리를 세우고」 부분
봄은 생강나무꽃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어서
어디서 본 듯한 노부부의 어깨에 노랗게 내려앉는 저 봄
-「목련 마중」 부분
주소를 잊었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구구절절 달빛에 걸어두고
-「홍매화에 적은 주소」 부분
어둠이 어둠을 완성할 때
절벽에 섰을 때
바람이 분다
-「꽃 지면 열리는 」 부분
고백은 솔직하고 담백하지만
고개 갸웃거리다 가끔 끄덕이며
떨어지는 꽃잎처럼
다음 약속을 던져준다
-「고요를 들키다 」 부분
민들레 홀씨였다가
모래바람의 알갱이였다가
허공을 휘젓는 헛것이 나였다고
-「그래도, 꽃 필 자리」 부분
사나운 바람에 흔들리던 그
깊은 숲속 나뭇가지에 줄을 걸었다는데
새벽빛 환한 수풀의 적막이 와르르 흩어졌겠다
-「상심경보」 부분
뜬금없이 햇살 한 귀퉁이를 훔쳐다가
부처님이라도 베껴서 건네주고 싶다
상처도 통증도 다 제 몫이 있다
-「간절한 것들의 오후」 부분
나는, 새처럼 가사가 없는 노래를 부른다
땅에 떨어진 감을 입바람 불어서 흙을 털고 웃으시던
어머니에게 배운 노래다
-「눈물 대신 흥얼거리는 노래」 부분
가슴에 가득 쟁여둔 아침과 저녁을
거미줄처럼 뽑아낸다
쓸쓸을 덜어내는 방식이다
-「쓸쓸을 덜어내는 방식」 부분
통증도 점이다
시작이거나, 끝이거나, 중심이 되는
점
비명처럼 붉은 불빛들이 환하다
-「점으로 세우다」 부분
못의 나이를 짐작하면 족히 수십 년은 되었을 텐데
휘어진 못, 튕긴 못, 잘린 못
비 내리는 날이면 내 가슴에서 녹물 냄새가 난다
-「그 사랑은 녹슬지 않아」 부분
세상에는
멀어질수록 크게 들리는 울음도 있다
-「어떤 울음」 부분
내 쓸쓸은 봄이라서 늘 푸르다
어쩌면 시퍼렇다
-「쓸쓸은 양지바른 쪽에 있다」 부분
차례
1부 꽃을 흔드는 바람을 당겨
저 붉은 새, 포인세티아/ 끄트머리 같은 말/ 불빛에 지워진 숨/ 달은 습관처럼 돌아오고/ 쏟아지는 신호등/ 가만히 바라보는 불청객/ 폭설 속으로 뛰어드는 말/ 이젠 울어도 돼/
흐린 꽃을 슬픔에 꽂고/ 북두칠성을 끌고 가는 사슴벌레/ 서 있는 것들은 위험하다/
서로를 건너지 않는, 섬/ 슬픔이 꼬리를 세우고/ 달팽이는 제 길을 가고/
덜 깬 잠을 덮고 있는 아침/ 녹지 않는 발자국
2부 저렇게 환한 분홍이 들어 있어서
목련 마중/ 홍매화에 적은 주소/ 워낭을 흔들고 간 장마/ 미루나무 그늘을 열고/
봄인데, 피지 않는 꽃/ 고양이 넝쿨/ 생을 타고 도는 냄새/ 꽃 지면 열리는/
고요를 들키다/ 봄비탈을 오르는 중/ 그래도, 꽃 필 자리/ 나비 효과/ 마음무늬/
길목을 지키는 환한 등/ 붉은 안부/ 쏟아지는 하늘을 긋고
3부 바람 소리 우거진 계절의 어디쯤
상심경보/ 보탑사 느티나무/ 푸른 울음/ 간절한 것들의 오후/여우비에 젖는 날/
기억이 출렁이는 바다/ 눈물 대신 흥얼거리는 노래/ 쓸쓸을 덜어내는 방식/
속이 빈 것들은 한쪽으로 눕고/ 코피티션Co-petition/ 사과씨의 오후/ 나는 엄마다/
몰아치는 짝사랑/ 열감기/ 하늘의 눈동자/ 국수를 삶는 불덩이/ 유피미즘euphemism
4부 시작이거나 끝이거나 중심이 되는, 점
대추나무에서 사는 말/ 즐거운 지각/ 허수어미/ 점으로 세우다/ 바람울타리/ 애어리염낭거미/ 흰둥이 눈동자 속 해가 저물고/ 그 사랑은 녹슬지 않아/ 어두운 발자국에 달이 차올라/ 얼음새꽃으로 오시는/ 바람에 엎질러진 울음/ 어떤 울음/ 모서리들의 계절/
나비가 오지 않는 꽃밭/ 초승달이 지는 창가/ 쓸쓸은 양지바른 쪽에 있다
해설 _ 아름다움이라는 의지
박동억
해설 속으로
생인손처럼 앓고 있는 세상의 불빛들
꺼지고 다시 켜지면서 점이 된다
나도, 세상의 점이거나 바람이다
내 안의 폭풍 같은 점에 걸려 넘어지거나
내 기둥에 기대는 사람도 있다지만
세상의 모든 통증은 바람 같아서
지나가거나 지워진다
언 땅의 흙을 파는 손톱이 붉은데
숨을 고르거나, 등을 기댄 사람들
물속같이 깊은 고요 속에서 지느러미를 꺼낸다
통증도 점이다
시작이거나, 끝이거나, 중심이 되는
점
비명처럼 붉은 불빛들이 환하다
- 「점으로 세우다」 전문
당신이 견뎌낸 만큼 나 또한 견디겠습니다. 당신의 고통도 나의 고통도 멀리서 보면 모두 ‘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세상이 숨 고르는 짧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세상을 서로 “등을 기댄 사람들”의 모습이자 “비명처럼 붉은 불빛들”로 가득한 점묘화로 이해한다. 여기에 놀라운 존재론적 성찰이나 사회학적 통찰이 깃든 것은 아니다. 이 간명한 하나의 작품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쉽게 실천하기는 어려운 간명한 도덕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저 쓸쓸한 ‘점’을 ‘불빛’으로 번역하듯, 그의 생애를 ‘환하다’라는 술어로 끝맺어보려는 의지이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려는 의지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시인은 세상 어딘가에서 쓰러진 채 일어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는 진실에 대해서는 증언하지 않는 셈이다. 하지만 오르테가는 『예술의 비인간화』에서 은유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인은 은유를 통해 현실을 다른 현실로 바꾸어 표현하는 자이고, 그렇게 현실을 회피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존재는 무기물과 다를 바가 없다. “제 죽음을 조문하는 은행나무 노란 불빛이 따듯하다”(「하늘의 눈동자」)라는 시구처럼, 이 시집의 모든 죽음과 고통은 다시 잎을 틔우는 몸짓을 예비한다. 마찬가지로 삶이란 본질적으로 희망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삶보다 큰 것은 삶의 의지이며, 고통 이후에 고통을 견뎌낸 몸이 있고 그러한 몸이 아름다움을 이룬다는 믿음을 우리의 혀끝은 간직하는 것이다.
해설 _ 박동억
저자 약력
윤혜숙
2018년 『문학사랑』 등단
시집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 『이별 사육사』 『그래도, 꽃 필 자리』
제4회 청양문학상, 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 수혜(2023, 2025)
현) 충남작가회의, 천안문인협회, 시소, 바람시 회원
천안문협 사무처장
gutnr123@naver.com
윤혜숙 시집 그래도, 꽃 필 자리
상상인 시인선 073 | 2025년 7월 3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 *205 | 130쪽
ISBN 979-11-93093-98-6(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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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충청남도 충남문화관광재단의 후원으로 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