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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명인숙 시인의 시집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는 슬픔이 침잠해 있는 삶의 면면을 자연에서 터득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안는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삶이란 마치 초록빛 숲속에 숨겨진 보랏빛 꽃처럼 은근히 아름다우면서도 그 속에 아련한 슬픔을 품고 있음을 말없이 얘기해 준다.
표제작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는 삶의 무게와 복잡한 생각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버리고 싶으면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가자"라는 구절은 복잡한 마음과 아픈 기억들을 자연 속에서 조용히 내려놓으라는 따뜻한 권유로 읽힌다. “걷기만 해도 비워지는 숲길”은 생각을 멈추고 침묵과 고요 속에 쉼표를 찍으라는 다정한 위로이며, 동시에 다시 채울 힘을 얻기 위한 소중한 쉼의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이 시집의 첫 작품 「명주달팽이」는 느리지만 견고한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느끼는 사랑의 모습이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따뜻한 시선이 감동적이다. 사랑이 반드시 뜨겁고 격정적일 필요는 없으며, 느리고 작지만 진심 어린 삶의 자세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여름 숲 도라지꽃」 역시 자연 속에서 삶의 고통을 위로하고 슬픔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시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나무와 별을 키우는 일이란 ‘그늘의 눈물을 다독이는 일’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시선은 맑고도 따뜻하다. 남보랏빛 꽃처럼 삶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시인의 감성이 인상적이다.
자연과 소통하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은 「씨방의 고백」과 「꽃샘」에서 더욱 깊어진다. 아주 작은 씨방 하나가 꽃으로 피어나듯 미세한 삶의 감정도 놓치지 않는 시인의 관찰력이 빛을 발한다. 특히 「꽃샘」에서 꽃샘바람에도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새들의 집을 짓게 만드는 자연의 손길은 삶에서 겪는 슬픔마저도 의미 있게 만드는 따뜻한 시선이다. 「그녀가 피었다」에서는 잊고 지냈던 꿈과 자아를 다시 발견하는 여정을 그린다. 삶의 무게에 눌려 꿈과 희망을 잊고 살았던 일상이 작은 꽃들로 피어나 다시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을 매개로 상실과 회복, 사랑과 꿈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시인의 온기가 돋보이는 시집이다. 「어디쯤에서 파도가 불어올까요」와 「그리움을 그리워하다」는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더욱 깊이 있게 담아낸다. 섬과 바다가 서로를 갈망하듯, 내면의 그리움과 슬픔은 시인의 따뜻한 언어로 승화되며 독자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 시집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고 인간의 삶과 슬픔, 사랑과 그리움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자연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 슬픔마저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세계는 독자에게 깊은 위안과 공감을 선물한다. 이 시집은 삶이란 때로는 꽃샘바람처럼 매섭고 때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연약하지만, 결국 이 모든 순간이 삶을 이루는 소중한 조각임을 따뜻하게 일깨워준다. 자연과 삶, 슬픔과 사랑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진 이 시집은 오래도록 독자의 가슴에 깊이 남을 것이다.
시인의 말
벌어진 틈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의 안녕이 온다는 걸 알았다
틈은 우리의 서막
만져 보고 안아 보고 느껴 보고 마주 보며
당신이 머물다 간 자리
오롯한 쉼의 행간이기를!
2025년 6월
명인숙
추천사
인생의 행간에서 당신과 나의 자리는 과연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명인숙 시인의 시들에는 미지의 여정에 발을 내민 시적 몸짓들이 있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은 여백들도 함께 엿보인다. 불시착에 가까웠을 “이별 앞에” 가까스로 멈춘 무수한 한숨과 머뭇거림은 다시금 피어난 오늘의 “당신 앞에” 완성되지 못한 채로 전해질 것이다. 아마도 이방인의 어눌하고 어두운 목소리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투는 “소란스러운 언어” 틈으로 낯선 침묵을 불러왔을 것이며, 마치 한겨울의 폭설처럼 모든 것들을 하얗게 뒤덮게 될 것이다. _정재훈(문학평론가)
가슴 깊이 묻어둔 작은 점 하나가 꽃으로 피어나는 시간, “달빛이 더 오래 비치는 곳에서 품는 바다” “꿈꾸던 풍경에 들었다 나온 오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물밑의 말”“어디쯤에서 파도가 불어”오는지 알 수 없어 그녀는 문장을 가지고 미로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언어의 길 찾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시적 대상을 찾아 꼬리를 물고 시작되는 감태의 돌림노래, 그녀의 노래가 펼쳐집니다. 가슴 먹먹해진 그녀의 사유가 서정으로 물결칩니다. 심해를 헤매다 기다림을 지나 쉼표 뒤, 명인숙 시인의 다음 시세계로의 여정이 궁금해집니다. _이선애(시인)
시집 속으로
적당히 가지기로 해요
치명적인 건 싫어요
당신의 밤이 나의 낮이니
『명주달팽이』 부분
흐르다 보면 당신의 끝자리
진짜 얼굴을 감춘 시간
이별 앞에 나를 세운 줄도 모르고
오늘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마지막의 시작』 부분
하늘에서 땅에서 간결하게 재잘대며
마구 흩날리는
분홍이었으면 좋겠다
『사월 아포리즘』 부분
넌, 은유와 직유를 배워 시를 쓰지만
난 차마 뱉지 못한 말을 담아 너를 열려고 해
『여름의 문장 열음 』부분
숲을 채운 수백 장의 연서들
부연 설명이 있는 슬픔만 이해되는 어느 여름날
『그 여름 숲 도라지꽃』 부분
영혼 품은 이름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풍경
상처 아닌 것이 있을까
『기억 끌어안기』 부분
괜찮아
괜찮아
그녀의 소리는 나를 키우는 숲이다
『여백을 읽어주는 숲』 부분
상처 틈으로 돋아나는 당신 얼굴이
장도처럼 깊어지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바다가 있습니다
『어디쯤에서 파도가 불어올까요』 부분
한 행 한 연 바다에 펼치면
시를 읽던 바다는 긴 편지가 되고
바다를 읽는 사람은 시인이 되지요
우리는 하나의 물이 되어 있지요
『여수를 활짝 펴서 읽으면』 부분
섬은
지워지지 않는 말이었다가
끝내
너를 지우는
물밑의 말
사랑했었다는 과거형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물밑의 말』 부분
차례
1부 달빛이 더 오래 비치는 곳에서 품는 바다
명주달팽이/ 마지막의 시작/ 한 사람만을 위한 나침반/ 결혼 에필로그/
징하게 끝나지 않는 노래/ 사월 아포리즘/ 여름의 문장 열음/ 그 여름 숲 도라지꽃/
기억 끌어안기/ zgm, 우리는/ 곶감 단상/ 달의 신앙/ 꽃밥
2부 꿈꾸던 풍경에 들었다 나온 오후
씨방의 고백/ 시인의 식탁/ 꽃샘/ 거짓말끼리 추는 춤/ 딸에게/ 그녀가 피었다/
로또의 에피소드/ 어머니의 방/ 시앓이/ 봄을 빌리다/ 흰 벽을 깁는 여자/
다시, 봄을 닦는 중입니다/ 여백을 읽어주는 숲
3부 어디쯤에서 파도가 불어올까요
소원을 돌고 돌아/ 시나브로 어디선가/ 꽃보기로 보는 세상/ 결혼하지 않은 여자/
어디쯤에서 파도가 불어올까요/ 공자를 만난 아침/ 그림자의 집/ 인형 손/ 내 구월의 남자
주문이 완료됐습니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다/ 기억을 부치는 시간/ 치매꽃 피니 기억꽃 지고
4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물밑의 말
찰랑거리는 눈빛 한 모금/ 고목의 옹알이/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첫 시/
살랑이는 봄으로 고백/ 엄마의 장롱/ 그때 그대로 그대를/ 여수를 활짝 펴서 읽으면/
꽃무릇 사랑법/ 우리 가끔은 곡선에서 쉬어가자/ 한 다발의 슬픔으로/ 양자리 여자
통도사/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물밑의 말
해설 _ ‘문득’이라는 흐릿한 경계에서 마침-쉼표를 찍는 일
정재훈(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지금까지 시인이 몸 담근 여로의 끝이 어딘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눈빛이 머문 시적인 순간들이 그러했듯 이것이 잠깐의 휴식인지, 아니면 정말로 여정의 끝자락인지는 아마 시인 자신조차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사건이다.
흐르다 보면 당신의 끝자리
진짜 얼굴을 감춘 시간
이별 앞에 나를 세운 줄도 모르고
오늘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늘 똑같은 모습으로 온다고 생각했지만
늘 다른 모습으로 와 나를 깨웁니다
한 번도 온전히 가져본 적 없는 시간이
되돌아와 흐릅니다
우리는
한 방울의 눈물
삼백육십오일 개미 쳇바퀴 돌듯
소란스러운 언어 잠재우고
12월로
우리를 다시 피우겠습니다
- 「마지막의 시작」 전문
인생의 행간에서 당신과 나의 자리는 과연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명인숙 시인의 시들에는 미지의 여정에 발을 내민 시적 몸짓들이 있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은 여백들도 함께 엿보인다. 불시착에 가까웠을 “이별 앞에” 가까스로 멈춘 무수한 한숨과 머뭇거림은 다시금 피어난 오늘의 “당신 앞에” 완성되지 못한 채로 전해질 것이다. 아마도 이방인의 어눌하고 어두운 목소리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투는 “소란스러운 언어” 틈으로 낯선 침묵을 불러왔을 것이며, 마치 한겨울의 폭설처럼 모든 것들을 하얗게 뒤덮게 될 것이다. 익숙함의 일시적 종말, 한해의 시린 분기점인 “12월”의 하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약속된 “다시 피우겠습니다”라는 말은 “한 방울의 눈물”과 함께 당신에게 전해진다. 이것이 당신과 나의 여정에서 쉼표가 될지, 마침표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은 그저 당신과 나의 관계에서만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하얗게 깔린 백색 위의 원고에서 시적인 몸짓에서 비롯된 불시착한 언어들의 흔적은 당장에 이곳의 문법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 방울의 눈물’과도 같다. 명인숙 시인에게 당신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시의 “진짜 얼굴”은 이 눈물로써 유일하게 증명되는 것이며, 그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곧 이곳 세계의 가장 끝자락에서 겨우 마주할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라 하겠다. 특히나 이 존재적 사건은 ‘이별’이라는 상황까지 얹어져서 더욱더 날카롭게 일상의 감각을 가로지른다. 날벼락과도 같은 이별의 냉혹한 선언 앞에서 그동안 쌓아 올린 시간과 인연이 모조리 무너질지라도 그 사건은 시적인 힘으로써 나에게 다가와 조금씩 “온전히 가져본 적 없는 시간”으로 탈바꿈된다.
버리고 싶으면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가자
아픈 마침표들의 얼굴이
새잎을 열어 곧게 가지를 뻗는다
걷고 걷다 보면
놓쳐버린 침묵 사이에
당신이라는 쉼표를 찍는다
감추고 싶은 생각들
비워져야 채워지는 마음
생각을 멈추면
맑은 물에
발소리조차 고요하다
걷기만 해도 비워지는 숲길
채우고 싶으면
월정사 전나무 숲으로 가자
-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전문
쉼표와 마침표의 차이가 한눈에 발견되기란 쉽지 않다. 시인의 행간과 여백에서 이것들은 문법으로써의 역할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눈빛의 머뭇거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예고된 적이 없었고, 인연이 끝났다고 하여 그 상상의 끈을 매몰차게 절연하지도 못했다. 쉼표와 마침표는 행간과 여백의 카오스 위를 떠다녔다. 시인에게는 분명 ‘문득’이라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쉼표와 마침표의 틈 또한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일종의 여백이다. 시적으로 건져 올린 말들도 일상에서의 다른 말들과 별다른 차이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하루하루를 결연하게 나아간다.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도 과감하게 버리기 위해 숲속이라는 어둡고 이질적인 행간으로 몸을 넣는다. 비워짐과 채워짐의 경계가 숲속의 어둠으로 희미해진다. 그늘진 마음 깊숙이 흘러내린 “슬픔의 수맥”(「여백을 읽어주는 숲」)은 언젠가 다시 환희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시인에게 슬픔이란 ‘한 방울의 눈물’처럼 너무나 희미하고 작기에 한눈에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응축된 눈물의 그 한 방울은 존재의 시간과 사건으로써 쉼표로도 읽히고, 마침표로도 다가올 수 있다. 비록 작은 점과 같더라도, 이것들의 힘은 서로의 마음을 꽉 붙드는 역할을 한다. 눈물로부터 시작된 ‘슬픔의 수맥’은 또 다른 눈물을 불러올 것이고, 마음과 마음 사이의 쉼표와 마침표는 또 다른 문장을 불러오면서 조금씩 숲처럼 울창하게 될 것이다. “한 행 한 연”(「여수를 활짝 펴서 읽으면」)이 합쳐져서 “바다”가 되고 그것은 당신을 향한 “긴 편지”로 전달되어 결국 우리 모두가 “시인”이자, “하나의 물”을 이룬다. 누군가의 눈물로부터 시작된 슬픔의 수맥이 물과 숲의 풍요를 가져온다는 시적인 상상에는 무한한 힘이 담겨져 있다. 그렇게 명인숙 시인은 ‘시인’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의 물꼬를 터서 숲속의 어둠과 바다의 깊이를 무한하게 펼쳐 놓는다.
…(중략)…
명인숙에게 시는 곧 누군가의 얼굴을 만나는 상상의 통로이며, 존재적 사건의 장場이다. 이것은 가희 ‘종교’에 버금간다. “눈물꽃”(「달의 신앙」)이 필 때마다 “아름다운 신앙”은 더욱더 그 교리를 환하게 비추게 될 것이다. 그 엄숙함과 처연함 앞에서 시인은 매일같이 “하루를 더듬는 손끝”(「흰 벽을 깁는 여자」)에서 “날마다 새로운 표정을” 건져 올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시를 쓰는 손에는 머뭇거림이 지배하고, 시를 읽어나가는 얼굴에는 늘 똑같은 표정이란 없다. 하루의 무게를 견디면서 시를 쓰는 손은 겸손하다. 자신의 시를 언젠가 읽게 될 누군가의 표정이 곧 ‘시인’인 자기 자신에게는 하나의 존재적 몸짓이며 신호처럼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손끝에는 지금 이 순간도 간절함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현실의 험악한 격랑 속에서 서로를 놓지 않으려 “꽉 붙들고”(「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물밑의 말」) 있겠다는 간절한 믿음은 앞으로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유일한 흔적이며,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재훈(문학평론가)
저자 약력
명인숙
전남 여수 출생
시·그림책 『결혼하지 않은 여자』
시집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
2025년 전남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is-myoung@hanmail.net
명인숙 시집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상상인 시인선 071 | 2025년 6월 3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12쪽
ISBN 979-11-93093-93-1(03810)
도서출판 상상인 | 등록번호 572-96-00959 | 등록일자 2019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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