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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김유진 시인의 시집 『고독의 두께』는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감정, 즉 ‘고독’을 무게도 길이도 아닌, ‘두께’라는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단위로 측정하려는 시적 시도이다. 이 시집에서 고독은 단순히 외로움이나 결핍의 정서가 아니라, 한 존재에게 서서히 침윤해 들어오는 감각이며, 내면의 지층을 형성하는 정서적 퇴적물이다.
표제작 「고독의 두께」에서 시인은 “입속에 돌처럼 씹히는 고독”, “밤새도록 쓰다듬는 턱수염”, “백지에 끄는 고독이란 두 글자”를 통해 고독을 살갗에 닿는 감각으로 묘사한다. 이 시집의 시들은 고독도 오래 쓰다듬으면 얇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시집 전체는 이 말의 진실을 하나씩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은 상실의 슬픔이라는 정서를 바탕에 두고 있다. 「비문의 풍경」에서 “사람과 사랑 사이가 멀어”진 이후, 풍경은 물웅덩이처럼 고여 있으며, “늙은 고양이”와 “태양의 총”이라는 이질적 이미지가 뒤섞이며 죽음과 소멸의 비가시적 징후가 풍경 속에 스며든다. 「오래된 날」은 보다 직접적으로 상실 이후의 통증과 회고를 다룬다. 반복되는 “멀리 계시나요”라는 질문과 “밤새 종이학을 접어”라는 동작은 부재의 존재와의 교신을 꿈꾸는 애도자의 기도이며, 시인은 부재의 그림자를 통해 독자의 기억을 환기한다. 이러한 상실의 슬픔은 과거의 한 점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존재와 시간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김유진 시의 가장 두드러지는 미학은 침묵을 견디며 말하는 태도이다. 「울음의 미완」에서는 “별로 쓸쓸하지 않은 방안에/집요하게 따라오는 축축한 고독”이 “습기 찬 벽 틈에서 벌레처럼” 기어 나온다. 이 시집 『고독의 두께』는 한 인간이 어떻게 침묵과 정적 속에서 내면을 길어 올리고, 그 안에 담긴 부재, 애도, 회한, 기도의 결을 시로 직조하는지 보여준다. 김유진의 시는 소리 높이지 않고, 감정을 부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낮고 조용한 톤 속에, 우리는 고독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 아니 고독을 희미하게 하는 사랑의 힘을 배운다. 그리고 이 시집의 책장을 덮은 후에도, 몇 편의 시들이 기도문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남는다.
시인의 말
말하고 싶었다
수많은 혀로 인해 시련이 왔지만
새는 내 말을 들어 주었다
새의 언어로 쓴 몇 마디 울음으로 회복되었다
새의 뜻대로 높은 풍경을 만들기로 했다
초승달이 허리를 굽히는 새벽하늘
예쁜 글들이 나의 글방으로 날아들었다.
2025년 봄
시집 속으로
뭉근한 살을 발라가며 한 끼를 먹는 나의 저녁도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격랑, 그 어디쯤에서 올라온 안녕 아닐까
-「굴비의 순간」 부분
말수가 적은 턱수염 난 사내
한밤의 조각 잠을 습관적으로 재떨이에 털며
백지에 고독이란 두 글자를 가슴으로 비벼 끄고
30촉 전등불에 엎드려
밤새도록 턱수염만 쓰다듬는다
다 빠진 턱수염을 자꾸 쓰다듬는다
난 충분히 이해되었다
고독도 오래 쓰다듬으면 얇아진다는 것을
-「고독의 두께」 부분
법천에 공손히 엎드려
세상 문신의 그림자를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부르튼 손으로 낙인을 서툴게 지워 본다
날마다 절寺 하나씩 허물다가
법천에서 반 평 남짓, 오늘 절 하나를 다시 짓고 왔다
-「법천사지法泉寺址에서 쓴 편지」 부분
알몸 같은 내 푸른 글아
눈부신 껍질이 흐득흐득 나를 찾을 때까지
제발 나를 따라오지 마라
-「끈질긴 고백」부분
내가
나를 그리려다
못난 사각이 되고야 말았다
-「명함」 부분
높은 곳에 올라
구멍 뚫린 가슴으로
종일 무얼 기다리고 있어
-「종소리를 멀리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부분
오늘은 다릅니다
파도가 하얀 치아로 종탑에 앉아
평화로이 웃습니다
-「소돌 어촌 주일 예배」 부분
그거 아세요?
바람이 머물지 못한 구멍을 버릇처럼 여닫고 다니는 거
애초부터 구멍에서 자라나는 인격은 기대하지 마시죠
일회용 컵은 아니지만 한 번 사용하고 버리고 싶을 때가 있죠
-「구멍 속의 구멍」 부분
나도 움에서 시작했다
바람의 입술을 붙잡고 헤아려
반짝이는 문장의 싹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이르려 하는지
의미의 집을 만들고 짐짓 껍질에서 기다렸다
-「움」 부분
무늬가 많은 계절이군요
더 많은 반짝임을 얻기 위해
아끼던 노란 책에 밑줄 하나 더 긋기로 해요
-「추색秋色」 부분
가볍고 아주 쉬운 것
눈사람같이 하얀 심장이 되어야만
진정할 수 있는 것
-「기도」 부분
그리운 것들은 모두
생선 타는 냄새가 난다
집 나간 고양이가 너무 잘 안다
-「냄새」 부분
차례
1부 하늘이 이유 없이 비스듬히 내게로 왔다
깊어지는 문/ 굴비의 순간/ 소금쟁이는 모른다/ 법천사지法泉寺址에서 쓴 편지/
중환자실의 숨소리/ 고독의 두께/ 무상無想/ 세월의 혀/ 사랑 이야기/ 비문의 풍경
오해/ 허수아비의 하루/ 횡계橫溪/ 끈질긴 고백/ 고추 이야기/ 낮달/
어느 철학서를 읽으며/ 매지에서 안녕한지/ 호박꽃
2부 파도가 하얀 치아로 종탑에 앉아
별에 간다/ 용대리 황태/ 양수리에서/ 향불의 밤/ 명함/
종소리를 멀리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밥그릇 주인/ 즐거운 관계/
소돌 어촌 주일 예배/ 동태의 노래/ 오이의 행로/ 은총의 무게/ 애순 언니/
오래된 날/ 눈사람/ 울음의 미완/ 기러기 한 가족/ 지천芝川을 위하여
3부 지상의 모든 밤은 블랙홀이 되어
풍경을 지키는 집/ 그날의 안녕/ 오징어의 하루/ 통증의 내적內的 흐름
설화雪花의 밤/ 구멍 속의 구멍/ 등대 외전外傳 / 그리움은 녹지 않아서/
빨래가 있는 뒷마당/ 느티나무 책방의 기억/ 눈물/ 푸른 엔딩/ 야간 비행
기다리는 메아리/ 치마 새/ 움/ 심心/ 레드 와인
4부 당신의 詩는 완성되지 않았나요
추색秋色/ 맨드라미의 저녁/ 여로旅路/ 눈의 배후/ 생선 통조림/
껍데기의 한 시절/ 구원/ 청계 호텔 정리記/ 그날의 금 지우기/
어스름/ 등/ 기도/ 길을 찾아/ 그날 바다가/ 냄새/ 둥근 청바지/
독성/ 오늘/ 헬로 마마꾸
해설 _ 상상력으로 날개를 펼친 독창성의 시 세계
이영춘(시인)
해설 중에서

*자아 찾기의 순례와 성찰의 시
높은 곳에 올라
구멍 뚫린 가슴으로
종일 무얼 기다리고 있어
제 몸을 때린 소리가
멀리멀리 그곳에 갔다가
무얼 데리고 오는지
그래서 종은
시선이 아주 먼 곳
지평선에 머물러 있어
힘들어도
계속 확인을 하지
종은 언제나
소리로 자신을 세탁하니까
- 「종소리를 멀리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전문
거짓도 가끔은
너의 글 안에서 진실이라는 말로 가면의 피를 흘린다
알몸 같은 내 푸른 글아
눈부신 껍질이 흐득흐득 나를 찾을 때까지
제발 나를 따라오지 마라
- 「끈질긴 고백」 부분
「종소리를 멀리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는 이 시도 우리의 일상을 반성하는 자성의 목소리다. 이 시에서 ‘종소리’는 타인을 위한 ‘종소리’가 아니라 화자persona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 울리는 ‘종소리’로 그 파장이 크다. “힘들어도/계속 확인을 하지/종은 언제나/소리로 자신을 세탁하니까”라는 표현과 같이 이 시의 종소리는 결국 자신을 위한 자성의 종소리, 깨우침의 종소리다.
「끈질긴 고백」은 김유진 시인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고백이다. “거짓도 가끔은/너의 글 안에서 진실이라는 말로 가면의 피를 흘린다”라는 행간에 깊은 사유思惟가 있다. 시 쓰기에 대하여 자성의 “피를 흘린다.”는 의미로 시 쓰기의 인내심을 역설한다.
…(중략)…
옥탑방에
고독 한 마리 홀로 산다
입속에
고독이 돌처럼 씹혀서
말수가 적은 턱수염 난 사내
한밤의 조각 잠을 습관적으로 재떨이에 털며
백지에 고독이란 두 글자를 가슴으로 비벼 끄고
30촉 전등불에 엎드려
밤새도록 턱수염만 쓰다듬는다
다 빠진 턱수염을 자꾸 쓰다듬는다
난 충분히 이해되었다
고독도 오래 쓰다듬으면 얇아진다는 것을
- 「고독의 두께」 전문
이 시의 제목 「고독의 두께」는 매우 특이하다. ‘고독에도 두께’가 있다는 뜻이겠지만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근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작가 ‘한강’은 ‘고독’을 순수한 우리말 ‘외로움’으로 대치시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외로움이 좋았다. 외로움은 나의 집이었고 옷이었고 밥이었다. 어떤 종류의 영혼은 외로움이 완성시켜 준 것이어서 그것이 빠져나가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만다.”(「검은 사슴」)라는 메타포로 외로움의 깊이를 시적 산문으로 작품의 깊이를 상승시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김유진 시인의 「고독의 두께」도 ‘외로움’에 대한 노래다. 외로움의 한자漢字인 ‘고독의 두께’로 시제 화化했다. 얼마나 고독이 첩첩이 쌓였으면 ‘고독의 두께’라고 표현하였을까! 이 시의 작중 화자는 ‘사내’다. 그 사내는 곧 작자 자신일 것이다. 얼마나 고독하였으면 “입속에/고독이 돌처럼 씹혀서/말수가 적은 턱수염 난 사내”가 되었을까? 그 사내는 “30촉 전등불에 엎드려/밤새도록 턱수염만 쓰다듬는다” 얼마나 턱수염을 쓰다듬었으면 “다 빠진 턱수염”이 되었을까! 이 시에서 “턱수염”을 쓰다듬는다는 것은 “고독”을 쓰다듬는다는 의미로 환치할 수 있다. 고독도 오래오래 함께하다 보면 타성에 젖어 “얇아진다는 것을” 비유한 페러독스적 작법으로 승화시킨 특이한 작품이다. -이영춘(시인)
저자 약력
김유진
강원 강릉 출생
2006년 『문예춘추』 등단
2009년 한전아트센터 초대작가
2022년, 2025년 강원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 수혜
2020년~2025년 원주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 4회 수혜
2023년 강원문학 작가상, 원주문학상 수상
시집 『거울의 시간』 『고독의 두께 』외 6권
kyjj560@hanmail.net
김유진 시집 고독의 두께
상상인 시인선 070 | 2025년 5월 30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44쪽
ISBN 979-11-93093-92-4(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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