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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엘리자벳 김의 『바다로 간 코끼리』는 사진과 시가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 보기 드문 디카시집이다. 카메라가 포착한 장면은 멋진 풍경의 인증샷이 아니라, 삶이 지나간 자리의 결을 드러낸다. 시는 그 결을 해설로 덮지 않고, 사진과 시 사이에 남겨진 여백을 통해 독자를 초대한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감각이다. 풍경 속에서 발견한 시간의 흔적이 먼저 서 있고, 그 앞에서 언어는 한발 물러나 오래된 침묵을 존중한다.
시집은 ‘빛’에서 시작해 ‘상실’로 기울고, ‘기억’을 경유해 ‘대지’의 숨으로 돌아온다. 빛과 함께 있던 날들이 지나면, 어느 날 문득 꺼져버린 빛 이후의 시간이 펼쳐진다. 그 흐름은 한 사람의 삶을 가르는 단절을 따라가면서도, 그 단절을 감정의 소음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면을 더 정밀하게 바라보게 한다. 붉은 협곡의 지층, 사암의 물결 같은 무늬, 협곡 사이로 스며드는 빛의 틈. 이러한 이미지들은 ‘자연이 아름답다’는 감탄을 넘어, 시간이 어떻게 물질을 새기고 마음을 깎아내는지 보여준다. 독자는 이미지의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형상에서 사유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시집에서의 여행은 지도 위의 동선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이다. 낯선 도시의 강가, 밤의 광장, 오래된 골목에서 화자는 더 또렷한 고독을 확인한다. 화려한 야경과 사람들의 소음 한가운데서도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이 흐르고, 약속의 자리에는 끝내 오지 못한 누군가의 부재만 남는다. 낯선 곳에서 확인한 고독의 서정은 과장된 탄식보다는 말이 줄어든 자리에서 오히려 선명해진다. 사진이 담는 것은 사람들의 빈자리이고, 시가 붙잡는 것은 떠들썩함이 아니라 한 줄기 정적이다.
이 시집의 시들에서 시인은 사랑을 거창한 고백으로 말하기보다 사물의 태도 속에서 발견한다. 서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서 있는 나무들의 거리, 손끝에 남는 온도, 오래 잠긴 자물통과 천천히 녹스는 약속들. 시인은 사물에서 찾은 사랑의 모습들을 조용히 보여주며, 사랑이란 결국 ‘함께 숨 쉬는 거리’를 지키는 일임을 환기한다. 동시에 상실은 감정에만 머물지 않고 물질의 시간으로도 지속된다. 바다로 가지 못해 굳어버린 호수의 눈물처럼, 그리움은 때로 형상이 되어 남고, 남아 있는 것들은 제 속도로 낡아가며 우리의 마음을 비춘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사진의 질감이다. 빛이 사물에 닿는 각도, 물기와 먼지가 남긴 표면, 멀리서 보면 하나의 풍경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상처처럼 보이는 결.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질문이 되고, 시는 그 질문을 단정하지 않은 채 독자의 내면으로 돌려보낸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는 경험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고 느끼는 방식이 바뀌는 것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시선은 자연과 생명의 노래로 옮겨가며, 죽지 않는 자연의 생명력을 확인한다. 대지는 여전히 숨 쉬고, 해가 뜨고 노을이 지지만, 그 이면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이 시집의 시들은 보여준다. 이는 세계가 완전히 회복된다는 약속은 아니지만, 세계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카메라에 다 담지 못한 장엄함과 적막함 앞에서 시는 오히려 겸손해지고, 담기지 않는 것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감각은 더 넓어진다.
표제작 「바다로 간 코끼리」는 정서를 응축한다. 수평선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코끼리의 슬픔, 그 슬픔을 담아내는 외로운 사진사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를 꿈의 섬. 시인은 감춰진 진실을 찾아내는 예민한 시선으로,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풍경의 결을 다시 만지게 한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독자는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 머무는 법을 배우고, 그 머묾 끝에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감정의 풍경을 되찾는다. 바다로 향하는 코끼리의 느린 걸음은 결국 우리 각자가 건너야 할 시간의 바다를 가리킨다. 시와 사진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조용히 곁에 두고 오래 읽어도 좋은 책이다.
작가의 말
이 디카시집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을 염두에 두고 시작된 작업은 결코 아니었다. 길을 가다 우연히, 여행지에서 바라본 풍경, 작고 낮은 것들에 대한 애정을 한 컷에 담아내기 시작했고, 그 감동 앞에서 잠시 멈춰 서며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리고 시로 담아내었을 뿐이다. 그렇게 모인 순간들이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사진과 시를 나란히 두는 일은 생각보다 조심스럽고 어려웠다. 사진이 너무나 많은 말을 하지 않기를, 시가 사진을 대신해서 설명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만 사진과 시 사이에 작은 여백 하나가 생기기를, 그 여백에 각자의 기억과 시간이 스며들기를 바랐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 자신한테 몰두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동안 나는 헤매었고, 휘청거렸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자주 ‘외롭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다리를 건너고, 길을 지나고, 도시를 옮겨 다니며 늘 외로웠다. 어쩌면 외로웠기에 더 몰두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수많은 길의 이동을 만들었지만, 이 책에서의 이동은 장소만이 아니라, 언어와 감각, 그리고 시선의 이동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나의 기록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이 책 속의 ‘나’는 늘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걷고, 함께 바라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풍경을 건너온 ‘우리’의 시간이 겹쳐 있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자주 뒤돌아보았다. 무엇을 이 사진에 담았는지보다,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지나쳐왔는지를 늘 생각했다.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은 풍경들, 글로 옮기지 못한 순간의 감정들, 역시 이 책의 보이지 않는 배경과 여백이 되어주었다.
디카시는 그렇게 남겨진 것들 위에 애정 어린 말을 건네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 책 사이사이에 남겨둔 여백이 독자 역시 자신만의 다리를 건너와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엘리자벳 김
디카시집 속으로
하루 20명만 들어오는 애리조나 광야에
억년의 정적이 흐른다
태초의 모습이 이런 것일까?
저 물결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갈까?
나는 울고 싶어진다
Only twenty may enter
this Arizona silence each day
a hundred million years ripple here
Is this what the beginning looked like?
I feel myself unraveling
- 「더 웨이브 The 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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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한켠에 앉은 악사
종일 하프를 뜯는다
사람들은 스쳐가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
허공엔 선율만이 홀로 춤춘다
A harpist sits in the courtyard
Plucking strings all day long
People pass- hurried, blind
No one listens
Only his melody dances along in the air
-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 The Music No One Hears」
로키산맥을 넘어
바람의 길 따라온 그대들이여
유칼립투스에 매달려 겨울을 나고
고향으로 힘차게 다시 날아올라라
Crossing the Rocky Mountains,
You came along the wind’s path
Clinging to eucalyptus, you wintered,
Then rise again, fly homeward
- 「제왕나비의 겨울나기 Flying over the Mountain」
차례
1부
빛과 함께 있던 날들
Before You
알바트로스 Albatross/ 사브리나 Sabrina/ 바로 나였구나 It was me All Along /
더 웨이브 The Wave/ 시간의 물결 The Wave of Time/ 시간의 틈 The Rift of Time/
뫼비우스 아치 Mobius Arch/ 입맞춤 Kiss/ 진짜 절 The True Temple/ 솔숲 Pine Forest/
가시 꽃 Flower of Thorns/ 절벽 아래 선텐족 The cliffside tanning club/
제비의 왕국 The Kingdom of Swallows/ 너에게 달려가는 중 Rushing Toward You/
바다로 간 코끼리 The Elephant That Walked into the Sea
2부
상실과 고독의 시간
After you
불타는 고요 The Burning Stillness/ 달에게 바치는 노래 Song to the Moon/
부다페스트, 그 밤 Budapest, That Night/ 프라하에서 In Prague/ 레논 벽 Lennon Wall/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 The Music No One Hears/ 소금기둥 Tufa/
너는 알고 있니? 봄이 다시 온 것을 Do You Know Spring has come again?/ 마법의 성 The Enchanted Fortress/
폐선 Wrack ship/ 푸른 빛은 어디로 갔을까? Where Did the Blue Light Go?/
말라버린 호수 Dry Lake/ 이발사의 다리 The Barber’s Bridge/
노이슈반슈타인 Neuschwanstein/ 은빛 광산의 유령 The Ghost of the Silver Mine
3부
기억의 자리
The Seat of Memory
이정표 Signposts/ 거리의 유쾌한 철학자 The Cheerful Philosopher of the Square/
대지를 박차고 Kick the sky/ 카를교 아래 볼타바는 흐르고 The Vltava flows beneath Charles Bridge/
아직도 기다리는 중 Still Waiting/ 녹스는 약속 Rusting Promises/
아우슈비츠의 벽 앞에서 Before the Wall of Auschwitz/ 심장의 색 Color of the Heart/
버지스 호텔 Burgess Hotel/ 엠바카드로 항구 Port of Embarcadero/
궤도 Track/ 금문교를 지나온 우리 We Who Crossed the Golden Gate Bridge/
악마의 발톱 Devil’s Claw/ 승자는 아직 없다 Still, no winner yet/ 자화상 Self-Portrait
4부
대지의 숨 -자연과 생명의 노래
The Earth’s Breath: Song of Life
황금 구 위의 무명 The Nameless atop the Golden Sphere/ 숨 Breath/
제왕나비의 겨울나기 Flying over the Mountain/ 담기지 않는 것들 The Uncapturable/
인디언 호수 Indian Lake/ 해무 Sea Mist/ 늙은 포도나무의 독백 Monologue of an Old Vine/
비극의 강 River of Tragedy/ 시간의 자비 The Mercy of Time/ 방랑의 음악가 The Wandering Musician/ 진리를 찾아서 Seeking the truth/ 소금 사막의 정오 High Noon over the Salt Desert/
극락조의 노년 The Aged Paradise Bird/ 뿌리 깊은 나무 Deep-Rooted Tree/
하늘의 강 The River in the Sky
해설 _ 역대급 사진의 행렬과 응축의 시
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해설 중에서
그의 시는 놀라운 풍정風情을 자아내는 세계 곳곳에서의 사진에 주목하게 한다. 이는 촬영의 기량과 발품의 노력이 함께한, 수발秀拔한 창의력을 증명했다. 이에 결부된 디카시의 문면文面들은 췌사나 첨언이 전혀 없이, 오직 시적 어의語義의 본류에 육박하는 간결하고 응축된 시행詩行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 양자가 조화롭게 만나고 융합하여 이토록 값있는 디카시의 집산集産을 이루었으니, 기껍고 흔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라건대 그의 지속적인 창작으로 인하여 더 넓고 깊은 시 세계의 축조築造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_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작가 약력

엘리자벳 김
· 샌프란시스코 FIDM(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 패션 디자인학과를 졸업
· 경희사이버대학 대학원 문창과 학사, 석사
· 경희해외동포문학상(한국평론가협회와 공동주최) 시부문과 수필로 신인상 등단
· 시조생활사 시조신인상등단
· 시천시조문학상 해외부분 대상
· 한국문화부 번역원 산하 웹진 <너머> 사진이야기-사진과 글 연재(2023년)
· 세계초청디카시인 디카시전시회 출품(2023년)
· 샌프란시스코 기독신문, 한국일보 연재, 현)현대뉴스 신문 고정칼럼 연재 중
· 북가주 한국학교 협의회 주최 글짓기 대회의 심사위원
· 샌프란시스코 한국문학인협회, 북가주디카시인협회, 좋은나무문학회 회장 역임
· 다수의 동인지 발간
· 디카시집 『바다로 간 코끼리』
E-mail_ elizabethkim0525@gmail.com
엘리자벳 김 디카시집 바다로 간 코끼리